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친정파의 와해와 노리히토 친왕의 옹립 === 12월 25일, 고시라카와인은 노리히토의 '친왕선하'를 행하고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신노쵸쿠벳토(親王勅別當, 친왕칙별당)로 삼았다[* 인세이 시기에 원칙적으로는 정비(正妃) 소생의 황자만이 '친왕선하'를 받을 수 있었던 데서 노리히토의 황위 계승 자격은 더욱 공고해졌다.]. 에이만(永万) 2년(1166년) 7월 26일에는 셋쇼 고노에 모토자네가 급사하고, 나이 어린 적자(嫡子)였던 모토미치(基通) 대신 마쓰도노 모토후사(松殿基房)가 새로운 셋쇼 및 씨장자(氏長者)로 임명되었다. 이때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덴카도료(殿下渡領, 전하도령)를 제외한 셋칸케(섭관가) 소유의 영지를 자신의 딸인 모리코(盛子)에게 상속시키는 데 성공했는데[* 모리코는 죽은 셋쇼 고노에 모토자네의 미망인이었다.], 이 조치에는 고시라카와인의 용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친정파를 지탱하던 후지와라 셋칸케와 [[헤이케]]가 인세이파로 돌아서면서 친정파는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고시라카와인은 친정파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인세이파의 세력 확대를 더욱 밀어붙였다. 7월에 미나모토노 스케카타가 산기(參議, 참의)에 보임된 것을 시작으로 8월에는 후지와라노 나리치카, 후지와라노 미쓰타카(藤原光隆)가 산기, 후지와라노 나리노리(藤原成範), 타이라노 요리모리(平賴盛, 키요모리의 이복동생)가 종3위 관위를 받는 등 고시라카와인의 근신(近臣)들이 차츰 구교(公卿, 공경)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반면 외척이면서도 인세이파를 저버린 후지와라 칸닌류에 대해서는 상황이 냉담한 태도를 보여서, 곤노다이나곤(權大納言, 권대납언) 도쿠다이지 사네사다(徳大寺実定) 및 후지와라노 사네나가가 사임했다. 사네나가는 이후 안겐(安元) 3년(1177년)에 운좋게 복귀할 수 있었지만 평생 산미(散位, 산위)인 채로 지내야만 했다. 10월 10일에 고시라카와인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협력을 얻어 마침내 노리히토 친왕을 황태자에 책봉시켰다. 태자 책봉의 의식은 셋칸케(摂関家, 섭관가)의 정저(正邸)였던 히가시산조도노(東三条殿)에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쿠조 카네자네가 도구노부(東宮傅, 동궁전),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슌구다이후(春宮大夫, 춘궁대부)가 되어, 셋칸케와 헤이케가 노리히토를 지지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11월에는 키요모리를 나이다이진(內大臣, 내대신)으로 삼았다. 인의 근신에 대한 관위의 승진은 대납언(大納言)까지가 한계였는데, 이미 고노에노다이쇼(近衛大将, 근위대장)로 있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대신(大臣)으로 임명된 것은 몹시 이례적인 일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여기에 후지와라노 사네나가가 사임한 곤노다이나곤(權大納言, 권대납언) 자리에 후지와라노 모로나가(藤原師長)를 기용했다. 모로나가는 [[호겐의 난]] 때 유배되었으나 고시라카와인으로부터 비파 연주를 인정받아, 다소 기회주의적인 경향이 강하던 당시의 상류 귀족들 가운데서는 가장 고시라카와인을 충실하게 따른 인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